작품 배치도

① 전시 캡션만을 위한 좌대
② 네 개의 좌대
③ 성물을 위한 좌대
④ 성물을 위한 좌대를 위한 좌대
⑤ 작은 판형의 책들을 위한 좌대
⑥ 상판을 위한, 결구되지 않은 네 개의 좌대
⑦ 관람객의 둔부를 수용하기 위한 세 개의 좌대
⑧ 여섯 개의 바퀴가 달린 좌대
⑨ 여섯 개의 바퀴를 보여주기 위한 좌대
⑩ 벽에 걸린 세 개의 좌대

전시 서문

배면(背面)의 지형학: 가구라는 이름의 좌대 위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꽃잎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내 주석 없이 셰이드의 시만으로는 인간적인 사실성을 갖지 못한다. 저자가 무심코 배제해 의미심장한 시행이 상당히 생략된 그의 시(자전적인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종잡을 수 없고 말을 아끼고 있다) 같은 작품이 갖는 인간적인 사실성은 저자와 주변 환경, 성향 등의 사실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오직 나의 주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언에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
주체와 객체의 전복: 사라짐을 명하는 공간에 대한 반역

전통적인 미술사에서 좌대(pedestal)는 언제나 스스로를 소거해야만 하는 기구적 숙명을 지녀왔다. 전시장 안에서 이들은 주인공인 오브제를 시각적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관람객의 시선에 결코 인식되어서는 안 되는 ‘지워진 지지체’였다. 주인공이 빛날수록 그것을 받치는 구조물은 투명해져야 하는 것이 전시 공간의 오랜 규율이었다.

<pe(des)tals!>는 이 완고한 배경의 체계를 전면으로 끄집어내어 무대 중앙에 세운 구조적 반역의 현장이다. 작가는 10여 년의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가구 제작자의 길로 들어서며, 직업으로서의 노동과 예술으로서의 목공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경험해 왔다. 스스로를 생업과 예술의 애매한 경계에 존재하는 ‘5년 차 자영업자이자 미숙한 예술인’, 즉 ‘경계예술인’이라 규정하는 작가의 정체성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유의 토대가 된다.

작가는 그동안 국내 유수의 미술관과 전시장에서 수많은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과정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전시장의 작가 명단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비용을 받고 다른 작가의 작품을 받치는 좌대를 만들거나, 거대한 설치물을 고정하고 복잡한 장치들을 감추는 케이스를 만드는 이름 없는 조력자였다. 때로는 벽을 세우고 조명을 설치하며 전시 공간의 틀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 전시는 이처럼 누군가를 묵묵히 받쳐온 작가의 노동이자 생업이었던 ‘좌대’를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적 주체로 격상시키는 시도이다. 배경이 전면이 되고, 조연이 주연이 되는 전복을 통해 작가는 조형 예술의 시각적 관습을 뒤흔들고, 그 틈에서 스스로가 뿌리내릴 수 있는 새로운 지형을 내보인다.

무의미한 오브제, 제도적 권위의 패러디

이 전시에서 목격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좌대의 신분 상승과 동시에 일어나는 ‘오브제의 추락’이다. 작가는 전시장에 들어선 10여 점의 좌대들 위에 예술적 아우라를 지닌 숭고한 작품들 대신, 철저히 무의미하고 일상적이며 세속적인 소품들을 얹어둔다.

전통적인 미술관 시스템은 평범한 사물이라도 좌대 위에 올려놓는 순간 그것에 신성한 권위와 미학적 가치를 부여해 왔다. 작가는 이러한 전시 권력의 ‘성역화 메커니즘’을 위트 있게 비틀어버린다. 좌대 위에 놓이는 사물을 철저히 무가치한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로 대체함으로써, 관람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브제가 아닌 그것을 받쳐주고 있는 구조물(좌대)로 향하게 된다. 이 구조에서 사물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의 위치 에너지는 그것을 지탱하는 인프라로 완전히 이동한다.

작가가 선보이는 지지체들은 저마다 다채로운 물리적 역학을 보여준다. 어떤 것은 전시장의 기본적 기능을 수행하고, 어떤 것은 바퀴를 달고 기동성을 실험하며, 심지어는 거꾸로 뒤집히거나 벽에 걸려 숨겨왔던 배면을 노출하기도 한다. 가구가 되기 전 원목의 상태를 스스로 흉내 내는 시적인 의태(Mimicry)에서부터 구조적 정밀함을 실험하는 마감의 변주까지, 전시장을 채운 좌대들은 더 이상 사물을 보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조각적 내러티브를 획득한다.

자투리의 잠재성과 맹목적 노동의 순환

작가의 노트를 관통하는 사유는 ‘맹목성’과 ‘축적’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공방 한구석에 무수히 쌓이는 자투리 나무 더미는 당장 경제성의 논리나 효율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완전한 성취’의 조각들이다. 미숙한 예술인임을 자칭하는 작가는 이 까마득한 가능성의 더미를 뒤적거리는 자신의 창작 행위를 도토리를 묻고 잊어버리는 다람쥐의 건망증, 혹은 들판을 뛰어놀며 온몸에 도깨비풀 씨앗을 무심히 묻혀오는 개의 즉흥적인 동작에 빗댄다.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숭고한 예술적 결단이라기보다, 매일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적 노동의 궤적이 남긴 부산물들의 집합체에 가깝다. 눈앞의 도토리 하나, 혹은 풀숲의 냄새에 집중하는 동물들의 맹목적인 행위가 결과적으로 숲을 만들고 영토를 확장하듯, 작가가 생계를 위해 가구를 만들며 치러낸 사적 동작이나 상념들은 전시장의 여과기를 거쳐 비로소 예술이라는 거대한 무언가에 기여하게 된다. 당사자는 모르는 채 묵묵히 행하는 그 작은 행위들이 결국 이 공간에서 예술로 전환하는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경험치의 방, 스스로를 부양하는 지지체들

결과적으로 이 전시는 취미와 직업, 생계 수단과 창작 욕구 사이의 모호한 경계 지점에 근근이 쌓여가는 ‘자투리 더미’ 속에서 희미한 ‘잠재력’이 움트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가구, 설치, 조형, 디지털 일러스트까지 장르의 구애 없이 사적 열망을 펼쳐놓았던 작가의 첫 개인전 <자기만의 방 (2021)>에서 시작해 <개와 고양이가 있는 방 (2022)>을 거쳐 뒤늦게 도달한 ‘방’ 시리즈 트릴로지의 영리하고도 묵직한 마침표처럼 보인다.

작가에게 방 3부작은 가구 작가로서의 정교하고 규격화된 완성형 도록이 아니다. 사물의 물성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배출해 내며 창작자로서의 기초 체력을 다진 미학적 ‘기본 경험치’의 총체에 가깝다. 특히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비매품의 형태로 전시장 안에 고착되어 있는데, 선형적 시간에 따른 마모와 사용감의 변화를 스스로 관찰하기 위한 이 시도는 일련의 제작 과정을 포함하여 전시장을 거대한 작가의 실험실이자 경험치 축적을 위한 필드로 변모시킨다.

전시장을 채운 좌대와 프레임들은 이제 누군가의 작품을 받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지워짐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부양하기 시작한 독립적인 조형적 선언이다. 이 방을 채운 노동과 창작의 서사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는 않지만, 그 경계에 선 작가의 가장 투박하고 정직한 고백을 통해 조심스러운 만개의 순간을 예지한다.

글쓴이 | 함인규 (미술 평론가)
작가가 직접적으로 말하기 힘든 미학적 변명과 부끄러운 셀프 찬사를 전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고안된 텍스트 장치. 작가 정체성의 뒷면을 부양하는 가상의 지지체(pedestal)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의 이름과 동일한 자음과 모음의 궤적을 공유하는 아나그램(anagram) 페르소나.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김윤하 역, 문학동네, 2019, p.35-36.

① 전시 캡션만을 위한 좌대

① 전시 캡션만을 위한 좌대 Pedestal Solely for an Exhibition Label
· 전시 캡션 An Exhibition Label
The moon's an arrant thief, And her pale fire she snatches from the sun.
달은 파렴치한 도둑, 그 창백한 불꽃을 태양에게서 훔쳐 가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타이먼 (Timon of Athens)』 중
관례에 따라 주석은 시 다음에 오지만, 주석을 먼저 훑어보고 그 도움을 받아 시를 읽어보길 독자에게 권유하는 바이다. 물론 시를 읽어가면서 주석을 다시 읽게 되겠지만, 시를 다 읽고 난 다음 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주석을 세번째로 참조해주었으면 한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

이 좌대 위에서 캡션은 더 이상 무언가를 외관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지시 대상과 지시 기호의 물리적 경계를 해제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엄숙하게 가리킬 뿐이다. 상호 부양의 순환 논리이자 자기 참조가 만들어낸 무한의 루프.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김윤하 역, 문학동네, 2019, p.35.

② 네 개의 좌대

② 네 개의 좌대 Four Pedestals
· 요다 Grand master Yoda
· 깐깐징어 Squidward Tentacles
· 흰둥이 Whitey the Dog
· 작품 부재중 Artwork Temporarily Absent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구매한 이 요다 피규어는 작업실에서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와 대련하거나 장지뱀, 개구리 따위를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 부러진 라이트세이버가 그간 거칠었던 전투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에너지가 응축된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부러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기로 한다.) 이 상처 입은 제다이 마스터야말로 불법 카피를 꺼리지 않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압도적 가성비가 만들어낸 우주적 균형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용 햄버거를 사먹고 얻은 이 녹색 오징어에게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고뇌하는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모습을 본다. 깐깐징어는 세속적인 자본의 굴레(집게사장)와 무지몽매한 대중(스폰지밥)에 둘러싸인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타협 없는 예술적 자아를 지켜내려는 예민하고 고독한 존재이다. 세상을 향한 경멸 어린 시선은, 곧 세상에 저항하는 젊은 예술가의 가장 순수하고도 처절한 모습이다.

짱구는 못말려 젤리를 무수히 먹어치우는 감미로운 형벌 끝에 손에 넣은 흰둥이 모형. 제 이름이 정갈하게 적힌 밥그릇은 몹시 귀엽지만, 실은 작업실에 무단 침입하는 곤충들을 위해 달콤한 양식을 올려주는 숭고한 식탁의 역할을 해낸다. 당분의 과잉 소비라는 세속적 대가를 치르고 얻은 나의 이 반려 피규어는, 톱밥 가득한 공방 구석에서 다종간의 생태적 환대를 묵묵히 실천하는 자비로운 급식소의 주인이다.

마지막 하나의 좌대에 올라갈 작고 흔한 성물은 지금 당신의 주머니 속에도 있을지 모른다.

③ ④ 성물을 위한 좌대(를 위한 좌대)

③ 성물을 위한 좌대 Pedestal for a Relic
④ 성물을 위한 좌대를 위한 좌대 Pedestal for a Pedestal for a Relic
· 엔믹스 사인 CD Autographed NMIXX CD
· 성물을 위한 좌대 Pedestal for a Relic

내 마음속에서 엔믹스는 현실적인 꿈을 집어던지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이상을 좇으라는 메시지를 반복해 들려주는 작은 목소리 같은 존재이다. 지친 하루 속에서 그 이름이 들려오면 어느새 분위기가 반전되고, 다시 치고받고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이 뿜어져 나온다. 이름조차도 어찌나 단단하고 생동감 있는지. 엔- 믹쓰. 혀끝이 앞니 뒤를 살짝 두드리고, 바로 입술을 붙여 터뜨리듯 이어지다 두 개의 닿소리로 분리되어 사르르 사라지는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너의 이름.

어느덧 불혹을 지나 혹독한 어른의 현실을 살고 있지만, 어릴 적 듣던 모험의 서사는 늘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대한 환상을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사는 게 아닐까. 엔믹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믹스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섯 명. 이런 류의 모험에는 커다란 배가 적격이다. 소년만화적인 이 구성은 중년의 낡은 마음조차 사로잡아 버렸다. 이들은 결국 세계를, 그리고 자신과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엔믹스의 노래는 세계관이라는 하나의 맥락 속에서 감상의 효과가 배가된다. 이들이 꾸준하게 유지하고 있는 서사적 맥락 속에는 각각의 곡 너머 끊임없이 연결되는 무한한 상상과 호기심이 샘솟는다. 자칫 공허할 수 있는 사랑과 도전의 습관적인 반복도 그 속에서는 복합적이고, 더 개인화된 형태의 정교한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끝내 도착한 믹스토피아는 상상 속의 이상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까지의 앨범을 통해 사랑으로 귀결되는 ‘복잡하고 예쁜’ 감정의 에너지를 끝없이 키워왔다. 엔믹스의 첫 정규 앨범 타이틀곡 ‘블루 발렌타인’이 정의되지 않는 난해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이야기였다면, 가장 최근 앨범의 ‘헤비 세레나데’는 그것을 마음껏 증폭시키고 함께 외치는 벅찬 순간이다. 멈췄던 행성에 다시 맥박을 돌게 하고 색색의 움을 틔우는 제세동기의 육중한 리듬이면서, 각자의 마음이 하나로 얽혀드는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멜로디이다.

엔믹스의 음악을 듣다 보면 단순한 감상자에서 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지의 위치로 삽시간에 끌어당겨지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사랑이라는 자칫 진부한 테마도 함께 지켜온 긴 여정의 말미에 마주한다면 마냥 새롭고 신비롭기만 하다. 나도 함께 모험하며 덩달아 감정의 레벨업을 경험한 느낌이다. 이 모험은 세계관 속 전설로서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멤버들의 사인이 담긴 첫 정규 앨범 CD를 위해 이 전시장의 한가운데 가장 빛나는 성소를 마련해도 과함이 없다.

⑤ 작은 판형의 책들을 위한 좌대

⑤ 작은 판형의 책들을 위한 좌대 Pedestal for Small-Format Books
· 작은 판형의 책들 Small-Format Books

제재목으로 가구를 만들 때는 나뭇결의 간격을 보고 어느 정도의 속도로 세월을 선 채 견뎌왔는지 가늠한다. 옹이 부근에서는 어느 위치에 어느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을지 생각한다. 이때쯤 유달리 추웠던 겨울이 있었구나, 어떤 면들이 한 몸으로 맞붙은 채 서 있었겠구나 상상한다. 하루는 나무에 박혀있는 납탄을 발견한 적도 있다. 북미의 어느 숲속에서 사냥꾼이 사슴을 향해 쏜 총이었을까?

어떤 날엔 유달리 심재와 변재의 대비가 뚜렷한 나무들이 보인다. 심재는 나무에서 형성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수명을 다한 조직이다. 연필의 흑연같이 횡단면의 한가운데 짙게 착색된 부분이다. 변재는 비교적 최근에 생성된 조직으로, 나이테 동심원의 바깥 방향으로 자라며 심재를 감싼다. 심재는 변재의 중심에 그대로 굳어 나무를 지탱한다. 원래의 기능을 잃어 생장에는 관여하지 못하지만 나무에서 가장 오래, 가장 굳건하게 서 있던 부분이다. 숲의 나무들은 한 자루씩 꼭 말아쥔 연필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무의 이런 모습들이 공방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치열하게 부딪치는 계절을 한자리에서 버텨내며 나무의 무늬가 만들어진다. 생장에 대한 기억은 그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고, 벌목과 제재를 거친 후에도 관성처럼 남는다. 거실 한구석에 얌전히 놓인 한 점의 가구에도 이 방향성은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나무를 마주하고 가구를 구상할 때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 한 그루의 나무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서 있었고, 몇 번의 계절을 보낸 끝에 어떤 방식으로 제재되어 내 앞에 왔을까? 다시 이 나무가 서 있을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 작은 책장은 벚나무 제재목으로 만들어졌다. 책이라는 대상물의 색채 언어를 전유하여, 스스로가 한때 뿌리내렸던 존재인 ‘나무’의 모습을 의태한다. 칸마다 꽂아놓은 분홍색, 초록색, 갈색의 책들이 각각 벚꽃과 잎, 가지가 된다. 바닥을 디딘 짙은 색 다리들은 가공된 가구가 다시 자연의 원형으로 회귀하는 유기적 서사이자 ‘피어남(Blooming)’의 고리를 완성한다.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책 선별에도 신경을 썼는데, ‘시추에이션 영어회화’, ‘바다낚시 첫걸음’ 같은 책들은 의도에 완벽히 부합하는 색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외했다. 이 꽂혀있는 책들 자체가 예술가인 척 의태하는 자영업자의 허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⑥ 상판을 위한, 결구되지 않은 네 개의 좌대

⑥ 상판을 위한, 결구되지 않은 네 개의 좌대 Four Unjoined Pedestals for a Tabletop
· 불안정한 상판 Unstable Top Panel

가구를 만드는 사람은 구조 설계부터 조립, 마감에 이르기까지 목재의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로 만든 가구의 크고 작은 변형은 필연적이다. 나무는 정적이지만 그 안은 끊임없이 떠들썩하다. 이 시끄러운 소리들을 달래주는 게 마감의 역할이다. 매끄럽게 마감된 가구의 표면은 나무의 생애와 사람의 생활을 연결하는 아주 얇고 투명한 교집합이다.

이 상판은 오쿠메라는 수종의 합판에 얇게 켠 오쿠메 원목을 테두리에 둘렀다. 무늬가 더 나은 면을 윗면으로 선택하고 색을 입힌 뒤 마감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 전시장은 나에게 일종의 경험치 축적을 위한 필드로 작용하는데, 몇 종류의 마감을 입히는 횟수라든가 여름날 마감 작업을 하는 시점의 기온과 습도, 각 마감 단계 사이의 간격 등을 실패에 대한 부담 없이 다양하게 실험할 수 있었다. 윗면에는 수성 스테인을 세 번 입힌 뒤 폴리우레탄 바니시를 올리기 전 셀락을 바인더로 사용해 보았는데, 알코올을 베이스로 하는 마감재의 특성상 틀어놓은 선풍기 바람에 거의 실시간으로 굳어 뭉치기 시작했다.

알코올로 뭉친 부위를 녹여 제거하고 스테인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포질을 반복한 뒤 폴리우레탄을 올렸는데, 다음날 완전히 평탄화되지 않은 셀락 부분이 여름날 논바닥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바닥면을 위로 뒤집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감의 실패가 고스란히 각인된 이 상판은 그 자체로 이미 불안정하다.

이 불안정한 상판을 지지하는 것은 네 개의 서로 다른 좌대이다. 물론 다리(legs)나 포스트(posts)라는 일반적인 용어가 있다. 가로 1,800mm에 달하는 상판의 휨을 막으려면 원래는 다리들을 가로지르는 지지대(Apron)가 있어야 하고, 흔들림을 잡기 위한 횡대(Stretcher)도 필수적이다.

이 작품에서 상판을 받치는 데 사용한 네 개의 지지체는 얇은 각재로 만든 다리, 굵은 하나의 기둥, 상자 형태의 육면체, 그리고 벽선반이다. 이 좌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상판을 떠받치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결속 없이는 온전한 책상의 기능을 완성해 내지 못한다. 가구와 예술, 그 경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서 있을 뿐이다.

⑦ 관람객의 둔부를 수용하기 위한 세 개의 좌대

⑦ 관람객의 둔부를 수용하기 위한 세 개의 좌대 Three Pedestals for Visitors' Posteriors
· 작품 부재중 Artwork Temporarily Absent

(이 좌대 위에 전시할 지정 작품은 현재 부재중이다. 전시 공간 내에서 두 발로 서서 본 안내문을 읽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장이라는 엄숙한 제도적 공간에서 관람객은 서서 움직이는 능동적 감상자의 역할을 통상적으로 떠안는다. 작가는 이 관성적 신체 활동에 개입하여, 지극히 속되고 일상적인 신체의 하부(둔부)를 전시장의 좌대 위로 올려놓는다.

좌대 위에 앉음으로써, 감상의 주체였던 관람객은 스스로 좌대 위의 오브제가 되는 미학적 전복을 경험하게 된다. 관람객이 스스로를 낮추어 무릎을 굽히고 좌대에 신체를 밀착시키는 순간, 이 작품은 비로소 ‘예술을 떠받치는 도구’에서 ‘삶을 지탱하는 가구’로의 전회를 완성하게 된다. 나는 의자를 좋아하는데, 육중한 인간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는 가장 물리적인 환대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나란히 배열한 세 점의 작품은 좌대의 형태에서 점차 프레임이 드러나며 가구화되는 구조적 전환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약하건대 “세 개의 의자. 필요하신 분은 사용하셔도 됩니다.” 정도로 바꿔 말할 수 있다.

⑧ ⑨ 여섯 개의 바퀴(가 달린/를 보여주기 위한) 좌대

⑧ 여섯 개의 바퀴가 달린 좌대 Pedestal on Six Castors
⑨ 여섯 개의 바퀴를 보여주기 위한 좌대 Pedestal for Six Castors
· 좌대 위의 바퀴벌레 pe(de)st(al)
· 여섯 개의 바퀴 Six Castors

제작자에게 가구의 뒷면이나 바닥은 일종의 양심 구역이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해서 긁힌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거나 마감을 대충 하면 언젠가 호기심 많은 사용자에 의해 미숙함이 탄로 나고 말 것 같은 생각에 내내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배면의 세심한 디테일을 항상 보이지 않게 두어야 한다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천장을 향해 모습을 드러낸 6개의 바퀴는 기동성을 상실한 채 그 자체로 조각적 오브제가 된다. 구르기 위해 태어난 바퀴가 굴러가지 못하고 시선의 대상이 되는 순간, 기능은 소멸하고 개념이 발생한다.

이쯤에서 계속 신경 쓰이는 ‘바퀴벌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벌레 모형을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배송료 포함 1,500원 정도에 구매했다. 이전에 다이소에서 플라스틱 바퀴벌레 모형을 샀는데, 단순화된 외형의 파티용 장난감이었다. 배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서 뒤로 당겼다가 놓으면 앞으로 기어가는 기믹이 들어있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좀 더 다양한 바퀴벌레 모형의 세계를 탐색하게 된 것이다.

두 마리를 주문했다고 생각했는데 문 앞에 도착한 국제우편 소포 속에는 12마리의 벌레가 바글거리는 비닐봉지가 두 개 들어있었다. 모형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투명한 비닐 속에 꽉 담겨있는 모습이 혐오스러워 섣불리 봉지를 뜯어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몰드로 정교하게 찍어낸 연질의 이 모형은 다리나 더듬이, 배 부분의 체절이 잘 구현되어 있고, 반투명하면서 약간의 광택을 띠고 있어 상당히 사실적이었다.

처음 본 순간 혐오했던 것에 비하면 두고두고 잘 활용하고 있는데, 주로 친구들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두는 데 쓴다. 올해 초에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도 몇 마리씩 챙겨가서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끔 작업실이나 집 서랍에서 뜬금없이 한 마리씩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할 때면 여전히 흠칫 놀라곤 한다. 친구들이 몇 명 되지 않기에 이렇게 방탕하게 소비하고도 십수 마리가 남아있다. (한 마리 갖고 싶은 분은 전시장 입구에서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⑩ 벽에 걸린 세 개의 좌대

⑩ 벽에 걸린 세 개의 좌대 Three Wall-Mounted Pedestals
· 액자 고리 Frame Hanger
· 잃어버린 공을 찾아서 In Search of Lost Balls
액자의 배면

액자의 뒷면에는 액자를 벽에 걸기 위한 반짝이는 철물과, 그 철물을 요철 없이 내장하기 위해 정확한 크기로 가공한 홈, 철물의 톤에 맞춰 세심하게 고른 나사못이 있다. 보이지 않는 뒷면이지만, 액자고리는 태생적으로 액자의 중심에 존재하며 균형을 맞춘다.

3차원 공간에서 좌대가 지면으로부터 오브제를 밀어 올리는 역할이라면, 벽에 걸리는 액자는 2차원 공간에서 외부의 환경과 내부의 작품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 전시장의 액자 안에는 관람객이 마땅히 기대하는 서사나 이미지는 없고, 빈 못 구멍만 존재한다. 이 못구멍은 매달려 있다는 그 자체의 기호로서, 바라건대 액자라는 사물 자체의 조형성이나 전시라는 공간적 상황을 온전히 감각하게 한다.

지름 1센티미터 미만의 저 구멍은 작품이 벽에 걸리기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 조건이다. 늘 벽면과 맞닿아 있던 액자의 구조가 전면으로 드러나면서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상상하자면 뒤집혀 걸려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이 액자는 커다란 전시장의 벽을 받치고 있는, 그래서 이 전시장 전체를 담고 있는 수직의 좌대인 셈이다. 전시장이 은밀하게 감추어 온 이 작은 구멍, 또는 균열 속에서 설치와 노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예술을 지탱하는 완고한 구조적 기저가 그 안에 있다.

뒷면에 못을 걸기 위한 구멍을 내거나 고리를 다는 것은 액자 제작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러한 타성, 관성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작업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원래 세 개의 액자를 걸고 싶었다. 네 개는 너무 많은 것 같고 두 개는 좀 적은 것 같아서 신중하게 정한 숫자였는데, 그 중 처음 작업한 액자는 고리를 설치하기 위한 구멍을 자연스럽게 ‘원래의’ 위치인 뒷면에 뚫어버렸다. 그래서 그 작품의 앞면에는 ‘원래의’ 액자 사용법에 맞춰 그림을 하나 그려넣었다.

김머ㅇ식

2014년 출생의 노령견 김멍식은 지난달 중성화수술을 받으며 생식이라는 종의 책무와 남성성의 굴레에서 면제되었다. 이것은 전립선 문제로 인한 수의사의 권고 때문이었는데, 미술 전시장에서 노견의 상실된 생식계통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은 다소 고상하지 못한 느낌이 있으므로 여기까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약 2주 가량 상처부위를 건드리지 못하게 넥카라를 씌워두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부딪치며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여기서는 넥카라를 쓴 강아지가 잃어버린 테니스공을 찾고 있는데, 바로 근처에 있는데도 시야가 가려 찾아내지를 못한다. 코를 바닥에 대고 킁킁거릴수록 시야는 더 차단된다.

나의 첫 전시에서는 ‘일상 속 예술적 성정의 발견’을 이야기했다. 예술이란 거창한 상아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생활의 자투리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포착하는 행위라고 믿었다. 그러나 5년 차 자영업자가 되어 척박한 작업 환경 속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작가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주문 가구의 납기를 맞추고, 견적서를 작성하기 위해 계산기를 반복해서 두드리고, 통상적인 시간 개념보다 수배는 빠른 속도로 도래하는 공방 임대료 납부일을 걱정하는 일상은 창작자에게 거대한 ‘생업의 넥카라’를 씌우는 과정과 같다.

예술적 영감과 열망은 마치 강아지의 발밑에 굴러다니는 테니스공처럼 당사자에게는 ‘분명 중요하지만 없어도 당장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는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생계라는 넥카라를 쓴 채 눈앞의 나무를 자르고 다듬다 보면, 바로 코앞에 잠재적인 재미나 의미의 덩어리들이 굴러다녀도 시야가 가려져 찾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나는 얼마나 많은 테니스공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쳐왔을까.

작가의 말

자투리 나무

작업실 한구석에 자투리 나무들을 쌓아 두는 공간이 있다. 재단하고 남은 부분 중 버리기 아까운 조각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작은 부품이 필요할 때 쓸만한 것을 찾아내거나, 자투리 모양을 보고 그걸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도 할 요량으로 쌓아두기 시작했다.

자투리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번거로운 일이다. 작업실이 밀려있는 와중에 더미를 뒤적거리느니, 새 자재를 재단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약간의 재료비보다 시간을 절약하는 편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작은 조각일수록 가공할 때 더 위험하기도 하다. 보관한 지 오래되었거나 입고 시기가 다른 나무들은 같은 수종이라도 미묘하게 색감이나 무늬가 달라 거슬릴 때도 있다. 자리를 차지하고 계속 쌓여만 간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런 이유로, 공방이 복잡해지기 시작하면 언제 사용하게 될지 모르는 이 작은 조각들부터 과감하게 폐기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자투리에는 지금은 특정할 수 없는 가능성이나 잠재성이 있지만 그것이 언제 발현될지는 알 수 없다. 기회가 잘 맞는다면 딱 맞게 활용할 수 있다 해도, 여차하면 그전에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 잉여의 부산물을 쌓아 올리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영업자로서든 예술인으로서든 뭔가 명확히 이뤄내는 것 없이 가능성의 조각들만 미련하게 쌓아가고 있는 중일수도 있다. 그리고 일이 안 풀릴 때면, 그 조각들을 언제까지 붙들어 매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한 번 갖다 버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불완전한 성취를 이어가는 작업을 느즈막히 지속하고 있다. 희망의 희끗한 끄트머리를 기대하며 까마득한 가능성의 더미를 뒤적이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허나 결국 버리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잠재성을 환기하는 계기는 되리라. 앞으로도 계속 내가 뭔가 만들고 자투리 나무들을 쌓아가는 한, 완성되지 않은 내 진행형의 성취는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투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낸 창작의 경험들이니까.

다람쥐, 개, 인간

상업공방을 시작하면서 사업자명과는 별도로 작업 공간에 ‘다람쥐와 기계’라는 이름을 장난 삼아 붙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좋아하는 것들 두 개를 단순 병치한 이름이다. 다람쥐도 근사하고, 기계도 귀엽고. 아니, 일반적으로는 다람쥐가 귀엽고 기계는 멋있지. 간혹 다람쥐가 나 자신을 뜻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귀여운 동물에 스스로를 치환하기 힘들어하는 중년의 남성이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둘 중에 기계 쪽을 담당하고 있다. 목공방의 나날들은 얼핏 보면 마음껏 돌아다니는 다람쥐처럼 자유분방해 보이나, 사실은 기계 같은 단순반복 업무의 연속이기도 하다.

도토리를 묻어놓고 잊어버린 다람쥐의 건망증이 숲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매우 낭만적이다. 하지만 다람쥐에게는 숲의 창조자가 되는 것보다 눈앞의 도토리 하나가 더욱 간절했을 수도 있다. 도토리를 잃어버리고 겨우내 주린 배를 잡고 자책했을까?

가끔 우리집 개를 데리고 공방에 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실내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오는 내내 멋진 산책을 기대한 이 작은 생물에게 몹시도 당혹스러운 일이기에, 공방 앞의 공터에서 최대한 힘을 빼고 들어간다. 개들은 풀숲을 뒤지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을 킁킁대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면, 목덜미에 도깨비풀 씨앗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털을 골라 풀씨를 떼어 멀리 던지면서 생각한다. 도깨비풀이 이런 방식으로 영토를 늘려 나가는 것은 누대에 걸친 도깨비풀의 설계이지 개의 의도적인 선의는 아닐 것이다. 개가 덤불을 헤집고 뛰놀고 놀이하는 사이 도깨비풀은 번진다. 숲과 풀들을 펼치고 번성하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동작들이 있다. 개나 다람쥐가 그러하듯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동안에 엄청난 성취를 느끼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지만, 돈을 벌거나 즐거움을 얻기 위해 가구를 만드는 내 사적인 동작들도 결과적으로는 어떤 큰 무언가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다람쥐도, 개도, 나도 있는 힘껏 눈앞에 놓인 일을 할 뿐이다.

피어나는 방

작업실에서 내가 하는 일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나무를 자르고 연결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서 결과물은 명확하게 좋아진다. 목공이 좋아 이 일을 선택한 제작자의 관점에서 몹시도 정직한 만족감을 준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일’에는 대개 ‘하기 싫은 것’이라는 속성이 들러붙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다소 모순적이다. 취미가 생계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겸하는 순간 툭 하고 불거지는 당혹스러운 통증이 있다. 취미화된 직업보다 직업화된 취미는 더 나빠 보인다. 상업공방을 운영하는 지금도 목공은 내가 지원하고 부양해야 하는 대상이다. 가구를 팔고 년세를 낸 뒤에도 돈이 조금 남으면 갖고싶었던 기계나 나무를 산다. 우리는 애매하게 서로를 먹이거나 살리고 있다. 난관이 있다면 애써 의연하게 대처하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즐거움은 찾아내면 되지 않겠냐는 단순한 셈법으로 이 일을 선택했지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방정식을 요구한다. 어쨌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투자해야 하고, 늘 계산기를 두드려 열정마저 분배해야 한다.

주문 받은 가구를 만드는 작업은 대개 제작자의 사적이고 자유분방한 창작욕구를 어느 정도 억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철저히 기능적인 배경이 되어야 하는 좌대와 같은 품목들은 더욱 그러하다. 좌대란 언제나 무언가를 받치기만 할 뿐 스스로는 지워져야만 하는 물건들이다. 이 전시는 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던 배경을 한가운데에 배치해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판매를 전제로 하지 않은 품목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은 아직 나에게 생소한 일이다. 금전적 반대급부로 치환되지 않는 노동은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어려움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에 둘 작품을 정신 없이 제작하는 와중에 가능성이나 잠재력 같은 것들이 소리 없이 작용하여 어떤 부가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0여 점의 좌대를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좌대만 만들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